이 말씀은 가인의 죄 가운데 있는 가인의 가문과 아담의 아들인 셋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속에 있는 가문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창세기 5장의 족보를 통해서 보여주고 습니다.
창세기 5장에서는 하나님이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는 세 명의 인물 아담, 에녹, 노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아담, 하나님의 형상 – 사람’ 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서 그 모습이 이전과 같지는 않지만 그 인간 안에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죄악 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베푸신 복이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바라크와 아쉐르입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은 아쉐르의 복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나님 앞에 행했을 때 받아지는 복입니다. 뭔가 잘하면 거기에 대한 대가로 주시는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은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나의 어떠함이나 나의 율법을 행함으로 받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물의 복입니다.
인간이 죄 가운데 있어서 온전하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온전하지 않은 인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복을 이어가시는데 그 복이 바라크의 복입니다.
상황과 환경과 내 모습으로 나를 판단하지 말고 예수로 나를 판단해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삶의 중요한 지표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계시다 라는것입니다.것 입니다.
2. ‘에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 생명’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계보는 누가 언제 태어났고 몇 살의 자손을 낳았고 몇 살에 죽었다 이렇게 기록되다가
22절에 에녹에서 한번 멈춥니다. 24절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이었습니다. 죄로 인한 죽음을 해결할 방법이 있는 에녹이었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가장 완벽했던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연상시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성을 쌓을 때 내가 강해지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철저하게 동행할 때에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3. ‘노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 위로’입니다.
노아의 아버지는 이름이 라멕입니다.
29절에 “그는 그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짓고 주님께서 말하였는데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그래서, 노아의 이름의 뜻이 위로입니다. 라멕은 노아를 통하여 인류에게 위로가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라멕이 56세가 되던 해에 생을 마감합니다. 라멕은 아담을 본 마지막 시대 사람입니다.
라멕이 113세였을 때에 에녹을 봤던 사람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전에 내려오던 에덴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고, 타락한 시대 속에 살면서 죄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반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봤던 사람이 라멕입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라멕이 노아를 통해 위로가 있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아담을 본 적도 없고, 에녹을 본 적이 없고, 오로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가장 타락한 시대 속에서 그 속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100년을 그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한탄 속에 하나님의 그 가슴이 찢어지는 그 후회 속에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한 사람이 노아였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단순히 물로 덮였다가 마르는 장면이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는 역창조입니다. 창조를 뒤집어 놓고 다시 재창조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빛꿍땅 - 창조의 순서
어둠만 있는 곳에 빛을 지으시고 빛과 어둠의 질서를 잡으시고, 물만 있던 곳에 물과 물 사이를 나누시고 하늘과 물을 나누시고 하늘 아래에 물만 있던 곳에 땅과 물을 나누십니다. 그리고 땅을 드러나게 하시고 생명을 채우십니다.
창세기 7장 노아의 홍수를 보면 창조의 반대로 해서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홍수가 비가 먼저 오지 않고, 땅의 샘이 먼저 터지고 땅과 바다를 가르신 것이 이제 땅의 경계가 사라져 버리고 그다음에 하늘의 홍수가 쏟아져 내려 하늘과 물의 경계가경계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40일 밤과 낮이 없이 빛이 없이 비만 내리는 창조이전으로 역행됩니다. 어둠 속에 물만 가득한 창세기 1장 2절의 그 모습 혼돈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가 끝나고 비는 그치고 빛이 비치고 하늘 위에 물은 사라지고 땅이 다시 드러나고 방주는 아라산에 멈추게 되고
생명들이 방주에서 나와서 다시 그 땅을 채워서 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다시 계속 이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아담에게 하셨던 번영의 축복을 하시면서 무지개를 보여 주시면서 언약을 맺으십니다.
무지개는 약속의 징표인데 무지개가 뜨면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야 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내가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가 세운 언약을 기억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약속의 힘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비 올 때마다 또 비가 엄청 쏟아져 두려울 때 비가 딱 그치고 무지개가 싹 뜹니다.
그러면, “아!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지. 하나님이 그 약속하신 것을 무지개를 보고 기억하신다 그랬지, 아!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구나!”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이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는 무지개를 약속하신 하나님을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바벨탑을 세우고, 스스로 보호하고 스스로 하나님 되고자 하는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시니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의로우시니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시니 할렐루야!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을 배역하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신실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악한 이 세상 속에서 나는 어떻게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력을 바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 길이 힘들고 어렵게 가는 길이 아니라 즐겁고 기쁨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완악한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자로, 선하신 주를 의지하여 살게 하소서.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주의 자녀로 주님만 따르게 하소서.
이 고백으로 하면서, 기도하면서 오늘도 나아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