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바울을 시기했던 유대인들이 큰 소동을 일으키고 바울을 죽이려고 해서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났고,
바울은 로마 군인들의 호위를 받아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총독 벨릭스가 있는 헤롯궁 가이사랴로 호송돼 궁에 수감이 되었습니다.
수감된 지일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더둘로라고 하는 변호사와 유대인들이 벨릭스 총독을 찾아와 바울을 고소합니다.
바울이 총독 벨릭스와 그 유대인들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이 본문 내용입니다.
1. 바울은 어디에 있는가?
수갑이 채워진 바울 앞에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대제사장 아나니아, 변호사 더둘로등 유대인들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과 다른 한 부류는 로마인들 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죽이려고 했냐면 유대인 자신들만 선택받고 특별하다는 선민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바울이 "여러분들은 선민 아닙니다. 여러분 특별하지 않습니다. 너희들 죄인이고 예수님 믿어야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말 즉, 사랑의 말이었는데 유대인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틀렸고, 그런 말을 하는 저들을 없애고 자신들이 맞다라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였고, 지금 그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예수님의 제자인 바울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부류인 로마인들은 바울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로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는 것을 승인한 부류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모두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관심이 없었고 로마제국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에 서 있는 바울에게
로마 사람이니까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무관심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도 보면, 예수님을 전했을 때 보통 두 부류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처럼 불편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로마인처럼 바보라고 비웃습니다.
적대심 아니면 무관심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적대심과 무관심 앞에 바울은 어떻게서 있냐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누군가는 죽이려고 하고, 누군가는 비웃는 그 상황 속에 상관없이 담대함으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담대함 이면에 이들을 위해 사랑으로 서 있다라는 것입니다.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도 말할 기회를 줄 때도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면서 그 변호의 시간도 복음을 전하는 시간으로 사용합니다.
의인이나 악인이 다 장차 올 부활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입니다.
바울이 부활과 관련되어서 옥에 갇혔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고발 당하지만,
나는 여전히 부활을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적대심과 무관심 앞에 너무 무서웠을 것 같은데 이렇게 담대하게 사랑으로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깨달은 겁니다.
원래 바울도 몰랐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 잡으러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가던 길에 '바울아 바울아 내가 왜 나를 받게 하느냐.'
그분이 진짜로 살아 계시구나, 아! 죽음이 끝이 아니구나! 를 경험한 후에
바울은 부활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했고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예수님 안에 있으니까 그렇게 담대하게 사랑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평안은 어디서 오는가?
변호사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이 우리에게 평안을 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당시 역사를 보면 벨릭스 총독은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탄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했던 총독이 벨릭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죽이려고 당신 덕분에 우리가 평안을 누린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평안, 평화를 이야기하는 더들로와 유대인들이 누구를 죽이고 싶어서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인이 그 평화이신 예수님, 평화를주시는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은혜가 바울로 하여금 담대하게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 나는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나만 줄 수 있는 평화를 너에게 준다’ 라고 말씀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께 주목하고 소망합시다.
3.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본문 25절을 보면, 총독 벨리스는 두려움을 느끼고 경험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왜 두려웠을까요?
바울이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장차 있고 죽음이 끝이 아니다, 죽음 뒤에 부활이 있다 심판이 있다.
악인은 심판 받고 영원한 형벌을 살아가게 된다라고 말했는데 그때 벨릭스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벨릭스가 자기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소망이 있었는데 벨릭스는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야 되는데, 그때가 하나님의 기회인데, 그 하나님이 주신 두려운 마음에 반응하지 못하고
바울을 일단 돌아가라고 했고, 그 마음속에 바울이 구제금이 많고 영향력도 있으니 어떻게 하면 돈 뜯어낼까 하며 자그마치 2년이라고 하는 시간을 가두어 둡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싸우는 싸움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반응하느냐, 일단 돌아서지 못하고 하던 대로 하느냐” 아닐까 싶습니다.
바울은 '바울아, 바울아 왜 나를 박게 하느냐'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바로 반응했으나,
벨리스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셨지만 바울처럼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역할이 ①말씀에 반응하느냐하고 ②바울처럼 누군가에게 복음을 듣게 하고, 복음을 듣고 돌이켜 결단할 수 있도록 돕는
이것이 아닐까 한번 생각합니다.
바울은 벨릭스총독을 향해 안타까워하고 슬퍼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가 가지게 되는 은혜의 능력입니다.
나를 위해 오래 참으신 예수님, 나를 위해 대신 죽임 당하신 예수님,
그분이 내 안에 오셔서 오늘 그분이 살아가심으로 나는 그 분에게 빚진, 그 빚을 다른 이들에게 갚으며 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